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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대별 과거급제자 명단(고려시대)

이영(李永)

시조 이중선의 아들. 고려 숙종 때 과거 급제. 직사관(直史館). 예부시랑(禮部侍郎). 예종(睿宗)이 태자일 때 태자시학(太子侍學).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인종(仁

宗) 때 첨서추밀원사(添書樞密院 事)로 추증.

 

 

2)시대별 과거급제자 명단(조선시대)

이숙번(李叔蕃)

1373년 계축생(癸丑生). 문과(文科) 태조(太祖) 2年(1393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즉 춘장시 (春場試) 문과(文科) 병과(丙科7) 전력은 생원(生員) 정사이등공신(定社二等功臣) 좌명일등공신(佐命一等功臣) 병조판서(兵曹判書) 좌찬성(左贊成)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

이량현(李良鉉)

1447년 정묘생(丁卯生). 문과(文料) 성종(成宗) 8年(1477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23). 전력은 교수(敎授). 관직은 현령(縣今). 전적(典籍). 아들 이숙인(李叔仁)

이숙인(李叔仁)

1460년 경진생(庚辰生). 자(字) 중원(仲元). 문과(文科) 성종(成宗)23년 (1492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23) 전력 전력부위(展力副尉) 관직 사예(司藝) 부 이량현(李良鉉)

이서인(李敍仁)

1492년 성종 23년 식년시 문과 갑과(式年試 文科 甲科) 등과. 사예첨정(詞藝僉正).

이기남(李期男)

1535년 을미생(乙未生). 자(字) 경우(慶遇) 선조(宣祖) 1년(1567년) 진사시(進士試) 소과(小科) 별시(別試)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 병과(丙科 13) 등과(登科). 전력은 진사(進士). 평양서윤(平壤庶尹). 증조부 이숙인(李叔仁)

이충직(李忠直)

1558년 무오생(戊午生). 무과(武科) 선조(宣袓)35년(1602년) 별시(別試) 병과(丙科) 첨추(簽樞).

이죽림(李竹林)

1618년(광해군 10년) 무오생(戊午生). 무과(武科). 관직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 1637년(인조 15년) 병자호란 때 왕명으로 함경도 근왕병(咸鏡道 勤王兵)을 총지휘하는 남영장(南營將)이 되어 철령(鐵嶺) 방면에 후퇴하는 청군(清軍)을 만나 대접전 전사.

이석록(李錫祿)

1687년 정묘생(丁卯生). 자(字) 대응(大膺) 문과(文科) 영조(英祖) 1年(1725년)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16) 합격. 전력 유학(幼學). 장령(掌令). 관직 군수(郡守). 동생 이석복(李錫福)

이석복(李錫福)

1694년 갑술생(甲戌生). 자(字) 계응(季膺). 호(號) 석암(石菴). 영조(英祖) 6년(1730년) 문과(文料) 정시병과(庭試丙科11)에 등과. 소과(小科) 진사시(進士試) 전력은 진사(進士) 장령(掌今) 안악군수(安樂郡守). 형 이석록(李錫祿)

이형우(李亨宇)

1736년 병진생(丙辰生). 문과(文科) 정조(正祖) 16年(1792년).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3). 거주지 은산(殷山)

이협심(李協心)

1777년 정유생(丁酉生). 문과(文科) 순조(純祖) 4年(1804년)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4) 전력은 유학(幼學). 거주지 천안(天安)

이최영(李最榮)

1836년 병신생(丙申生). 자(字) 성여(誠如) 문과(文科) 고종(高宗)17년(1880년). 전력은 유학(幼學)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33). 거주지 천안.

                * 과거(科擧) 급테재及第者) 57名. (문과(文科) 9명, 무과{武科) 28명,사마시(司馬試) 20명.)

                   〈일반 자료 韓國學 知識>    

 

 

3)여타 과거 급제자 명단

 

아래 명단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과거 급제 방목 즉 국조방목(國朝榜目) 해동방목(海東榜目) 등에서 가려낸 자료인 것으로 사료됨.

고려시대 문과

이영(李永)

조선시대 무과

이강(李岡) 이경순(李景順) 이계신(李繼身) 이기조(李起袓) 이대수(李大壽)

이덕형(李德兄) 이득길(李得吉) 이몽춘(李夢春) 이바리쇠(李件里金)

이성립(李成立) 이성증(李聖曾) 이세일(李世一) 이수방(李綏邦) 이육(李)

이윤흥(李潤興) 이응복(李應福) 이익(李翼) 이익량(李益良) 이익희(李益禧)

이일남(李曰男) 이정(李晶) 이중길(李仲吉) 이철수(李喆洙) 이충일(李忠一)

이충직(李忠直) 이택하(李宅夏) 이훤(李萱) 이흥주(李興胄)

조선시대 문과

이기남(李期男) 이석록(李錫祿) 이석복(李錫福) 이숙번(李叔蕃) 이숙인(李叔仁)

이량현(李良鉉) 이최영(李最榮) 이협심(李協心) 이형우(李亨宇)

생원 진사시

이교(李郊) 이국형(李國衡) 이권(李權) 이기남(李期男) 이달운(李達運)

이방로(李邦老) 이석복(李錫福) 이수만(李綏萬) 이식(李植) 이약윤(李若)

이약일(李若舶) 이언룡(李彦龍) 이일기(李一耆) 이일주(李一舟) 이재주(李在周)

이징휘(李徵輝) 이헌(李軒) 이헌식(李憲植) 이협찬(李協贊) 이호(李祜)

(안성이씨 합문부사 카페 자료)    

 

 

4)근대인물

 

21세(世) 중묵(重默)

중묵(重黙) 할아버님의 호(號)는 면제(勉齊)이고 밀직부사공 14세손이시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진실했으며,효성이 지극한 천성을 지니셨다 한다. 웃어른들을 잘 섬기고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였다 한다. 아무리 고생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었을 때도 나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셨다고 전해진다. 한여름에도 옷을 벗지 않은 채 윗분들의 시중을 들었으며,추울 때는 윗분들의 손발을 따뜻하게 해 드리기 위해 매일같이 방을 데우셨고 더울 때는 부채를 부쳐 윗분들을 시원하게 해 드렸다고 하니 그 분의 효심이 인근 마을까지 회자(膾炙)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계유년(癸酉年) 1739년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퍼져 수많은 사람이 죽고 이로 인해 주민들이 전멸한 동네가 한두 곳이 아니어서 전염병을 피하여 안전한 산골로 피신하셨을 때에도 중묵(重黙) 할아버님은 전염병이 물러갈 때까지 윗분들을 잘 모시고 봉양을 잘 하시며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하여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효자 집안엔 전염병도 피해 간다고 하였다. 더구나 무서운 전염병에 걸려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을 거두시는 데도 앞장서시어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당시 유림에서는 중묵 할아버님을 맹자(孟子) 순자(荀子) 왕희지(王羲之) 등과 비교하여 학문은 덜할지언정 덕행만큼은 그들보다 낫다고 하였으며,조정에서는 연안읍 오주리 작은마을에 효자문(孝子門)을 세우게 하여 세상 사람들이 중묵 할아버님의 효심을 오래도록 칭송하도록 하였다.

 

충신은 효자 집안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그의 효심과 덕행이 입과 글로 오래오래 전해지고 있다.

*중묵{重黙) 할아버님은 조선 영조 37년 1761년 12월 7일에 태어나셨고 순조 13년 1813년 12월 27일에 돌아가셨다.

*직계손 이종우(李鍾雨)의 8대조 할아버지

23세(世) 혁동(爀東)

이혁동(李爀東) 할아버님의 호(號)는 장곡(長谷)이고,밀직부사공 16세손이시며 천성이 착하고 효심이 두터우셨다 한다.

혁동 할아버님은 부친이 병으로 인하여 명이 다하자 당신의 왼쪽 손가락을 단지하여 그 피를 부친이 드시게 하는 등 갖은 정성을 다하였으나 하늘이 부친의 쾌유를 허락하지 않았음인지 3일 후 운명하셨다 한다. 이때 혁동 할아버님은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고 앉아 크게 통곡하니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한스럽고 애절한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붉게 하였다 한다. 또한 상을 치르신 후에는 방안에서 두문불출하시며 고기,생선 등 반찬에 일체 손대지 않으시고 죽만 드시었다 한다. 매일 같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므로 인해 무릎이 상하셨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방안에서 혼자 조용히 글을 읽으시고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시며,부친의 은덕을 회고하는 등 효심을 깊게 하셨다. 매일 해가 뜨고 지는 아침과 저녁 무렵에는 방안을 서성거리며 부친의 은덕을 기리기를 계속하셨고,늘 같은 언행으로 인하여 동네 사람들이 혁동 할아버님의 진실한 효심을 모두 알고 칭송하였다 한다. 이러한 지극한 효심은 후손들이 혁동 할아버님의 뜻을 본받아 자식들을 엄격하게 교육시키고,훈계하며 세상을 살아가면서 선비가 지켜야 할 진실성과 도덕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63년[지금으로부터 140여년 전] 정조 당시 유명했던 성리학자로 조선 고종 임금 당시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올림으로 대원군의 실정을 천하에 고하고 10년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께서도 혁동 할아버님의 행적을 자신의 문집에 실어 그의 효심을 극찬하였다. 지금도 그 문집이 전해 오고 있다 한다.

* 혁동(爀東) 할아버님은 조선 순조 임금 당시 1817년 3월에 태어나셨다.

* 직계손 이종택(李踪澤)의 6대조 할아버자

   〈密直副使公派宗誌〉

泌세(世) 은상(殷相)

이은상(李殷相) 할아버님의 자(字)는 창로(昌輅),호(號)는 입제(立濟)이시고 밀직부사공 19세손이시다. 일찍부터 학문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셨는데,어찌나 총명하셨던지 표현과 생각을 나타내심에 있어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셨다 한다.

 

당시 유명한 성리학자이며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올려 대원군을 10년 권좌(權座)에서 물러나게 했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은상(殷相)할아버님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신 나머지 일찍부터 제자로 삼으시고,최익현 문하(門下)의 규칙과 제도를 따르고 지키게 하셨으며,후에는 용주서당(龍州書堂)을 열어 은상 할아버님으로 하여금 많은 선비들에게 학문을 펼칠 수 있도록 하셨는데, 그 학문의 깊이가 실로 대단하여 스승인 면암 선생과 견줄 만하였다 한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연백군 및 이웃 여러군에 있던 많은 선비들은 문무관 벼슬을 지내셨던 할아버님을 모시기 위해 봉양사(鳳陽祠)를 지었으며,조상님들과 관련된 진실된 행적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낭송하는 등 그분의 고귀한 삶을 음미하도록 하여 지표(指標)를 삼도록 하였다 한다.

 

한편 은상 할아버님께서는 효심이 극진하시어 부모님의 상을 치르시는 기간 중에는 날씨가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부모님 묘를 지극으로 살피시고,무릎이 부어 상하기까지 절을 많이 하시어 마을 사람들이 할아버님의 효심을 극찬하였다 한다.

 

유명한 문필가들이 은상 할아버님의 덕망과 효심을 극찬하는 글을 많이 남겼으며,또한 면암집(勉庵輯)과 연안지(延安誌)에 그 분의 글이 실렸을 정도로 학문에도 매우 뛰어나셨다고 한다.

 

은상 할아버님은 1935년 을해년 6월에 돌아가셨으며,당시 유림장(儒林葬)으로 장례를 행하였는데, 상여 뒤를 따르는 제자와 만장(輓章)은 실로 대단했다 한다.

* 은상(殷相) 할아버님은 조선 고종 임금 당시 1873년 4월 28일에 태어나시어 일제시대인 1935년 을해년 6월 10일에 돌아가셨다.

* 직계손 이종찬(李鍾贊)의 증조부이다.

〈密直副使公派宗誌〉

헤(世) 유섭(由燮)

31세손,한진

저는 안성이씨 합문부사공파 29세 유섭님의 손자 31세 되는 이한진입니다. 저희 조부님께서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존경하고 훌륭하신 큰 어른이셔서 미덕한 제가 감히 기록하기 조심스럽습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제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듣던 대로 자세히 말씀드릴까 합니다.

조부님의 애국심,선대 조상님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웃에 대한 봉사 정신,가 족에 대한 교육과 치적을 쌓으셔서 손자인 저도 장계 고장에서 수많은 칭송을 전해 듣습니다.

모든 존경하는 종친께 고하여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가문의 소중함과 가정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과 삶의 지표로 삼았으면 합니다.

조부님은 합문부사공파 28대손 기필님의 둘째 아들 유섭으로 1886년 6월 20일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나서 시대적으로 구한말,일제강점기,6 • 25 전쟁 등 격변기를 고난과 역경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일찍이 선대 26세인 거선대부호조참판 중조상님을 지내시고,27세 무과가선대부중구를 지내신 비교적 부유한 가정이었으나 28세인 부모님은 언어장애가 있으셔서 한학문(漢學問)에 전념하시며 글로서 소통하시고 후학양성에 힘쓰셨습니다.

 

형님이신 권섭님은 부친의 뒤를 이어 가난한 선비의 길을 사시며 곤궁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조부님은 부부가 힘을 모아 낮에는 논밭에서 벼, 보리, 감자, 담배를 가꾸시고 길쌈과 새끼,가마니를 짜시며 농한기인 겨울과 한여름에는 쌀,보리(곡식)와 담배를 어깨에 지시고 산청, 진주,삼천포 등지에 오실 때 미역,김,소금을 가져오시는 길에 파셔서 부를 축척하셨습니다. 조부모님은 새벽부터 산과 들에 땅을 파고 씨를 뿌려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으며,조부님은 입버릇처럼 가난이 죄냐 밤을 낮같이 일하면 못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일하셔서 해마다 좋은 기름진 땅과 산을 사셔서 큰 부자로 거듭 나셨습니다. 조부모님의 부친께선 재주가 뛰어나 새로운 베틀을 만드셨는데 전주에서 한번 보고 그린 그림으로 연구하셔서 완성하여 마을에 보급하셨답니다.

 

항상 선비의 기품과 자존심이 강하셔서 가난해도 양반의 풍모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조부모님은 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좋은 음식과 약을 구해서 운명하실 때 정성을 대해 효도를 하셨습니다.

형님의 가난을 해소하기 위해 세 차례나 대곡리 주촌 성곡,남원 운봉에 집과 전답을 마련해 주시며,조카 5남매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하셔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특히 집안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하셔서 형님 자제(조카)에 더 잘하시고 다 나누시며 “내가 배고프면 남 배고픔도 알아야지” 하시며 집안에 일하는 머슴에게도 배불리 먹고 잘 입혀서 서로 다투어 들어오고 삯일을 오면 온 가족이 다와서 더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조부모님의 장남 재권님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셔서 많은 학문을 익히셨는데,일제 강제 징용을 가셔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평생을 기다리시며 가슴에 묻고 사셨는데 ‘나라가 강해야’ 하시며 애국심을 불태우셨습니다. 6 •25 전쟁 당시에는 인민군에게 감추어 두었던 곡식과 가축을 다 뺏기시고 빨갱이 토벌하는 토벌 경찰들에게 세간을 다 내어주시며,숙소로 집 전체를 내주시어 숙식하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이웃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하셔서 많은 논과 밭 토지를 이웃 주민에게 주었는데 농지 개혁으로 다 내주시자,한분 곽생원은 양심적이어서 굳이 안 받고 돌려 주신다기에 내 논을 다시 돈을 주고 매입하셨습니다. 지금도 후손끼리는 한 집안처럼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조상님에 대한 효심은 헤아릴 수 없이 지극하셔서 산지를 사서 25세 (효증) 증 조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많은 쌀,떡,고기 등을 처마에 걸어 두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고향에 가면 어른들이 말씀을 하시며 부잣집 이씨 네 자손이라며 부러워하십니다.

〈도표〉조부님이 기부한 토지 내역

 

이밖에도 많은 재산으로 해마다 시제를 극진히 모시고,묘역 조성에도 깊은 심려를 기울이셨습니다.

평소에도 말씀하기길 ‘조상 잘 모시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내외간 잘지내면 복은 절로 굴러 들어온다’ 하셨습니다. 조부님은 본인 보약 한첩,흔한 닭 한마리도 잡수시지 않으시면서 조부모님에게는 보약(한약,꿀,인삼)을 끊임없이 드시게 하시며,본인은 전쟁터에 간 장남(재권)이 오면 다리 뻗고 먹겠다며 한사코 거절하셨습니다. 한 마을에 다툼이나 송사에는 앞장서 해결사라는 별명을 얻으셨습니다. 불의를 보거나 경우에 어긋나면 즉시 불호령이 떨어져 어린이에게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불리셨습니다. 명절에는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가보처럼 내려오는 조상님의 교지 다발을 보여주시며 “조상님의 훌륭한 업적을 잊지 말고,재산은 훔쳐가도 머릿속의 지식은 못가져 간다. 열심히 배워라” 하시며 가르치셨는데,저는 그땐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조부님이 73세에 눈을 감으시며 유일하게 저에게 “공부 잘해라. 공부 열심히 해서 큰 일꾼이 되어라” 하시며 눈을 감으셨는데 자신의 꿈을 손자가 이루길 소망하셨습니다. 지금은 못난 제 자신을 늘 부끄럽게 여기며 큰 빚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희 부친께서 조부님 가르침에 따라 조모님을 극진히 모셔서 주위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조모님은 90세를 사시며,80세에 소먹이를 주시다가 소에 밟혀서 고관절 골절로 10년을 방 안에서 거동을 못하시자 부친은 한 방에 기거하시며 성심으로 수발을 하여 완쾌되어 출입하시다 노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잘 모신다며 장수군수와 장수향교에서 세 차례 효자상을 받으셨습니다. 조부님은 “선대 조상님 잘 모시고,부모 형제에 우애 있게 지내라” 하시는 말씀이 귀에 선합니다. 특히 부부 금실이 좋아 화목했으며,남을 먼저 생각하고 근검절약을 온 몸으로 실천하신 큰 가르침을 진실로 가슴 깊이 새겨 봅니다.

 

끝으로 조부모님이 꿈꾸던 세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저로서는 보람을 느끼며 조부모님의 유지를 미약한 제 소견으로 기록함으로 종친 어른에게 고할 수 있어서 더없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마음의 짐을 덜고 새삼 조부모님의 유지를 받들리라 다짐해 봅니다.

2012년 6월 25일

30세(世) 규대(圭泰)

31세손,우영(祜英)

한 편의 글로 사람들의 아침을 새롭고 다감하게 열어 준 불세출(不世出)의 기자 이규태 선생. 선생은 격변하는 나날을 변치 않은 과거를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겨냥하고자 하셨다.

펜으로 시작한 글쓰기 수단이 컴퓨터 키보드를 치는 세상이 되도록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계층 독자에게 일상의 징후를 웅숭깊게 새겨 전달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아울러 특유의 친근한 문법으로 보편타당한 쓰기와 일기의 경지를 여셨다.

선생의 본관은 안성(安城)이시다. 안성 합문부사공파(閤門副使公派) 봉례공파 후손으로 1933년 전북 장수(長水)에서 이전섭 선생의 4남으로 태어나 유년을 고향에서 보냈다.

 

일제와 해방 그리고 사상 대립의 혼란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남다른 감수성은 이 무렵에 홈백 젖고,자라서 훗날의 문필 활동에 더없이 소중한 바탕을 이루었다.

시대의 첨단을 예리하게 응시하시면서도 일찍이 체득한 농경 정서가 뒤를 받쳐 기사와 칼럼이 한결 넉넉한 설득력에 넘쳤다.

전주사범학교(1952년)와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하시고(1956년) 선생은 잠시 군산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가 1959년 3월 조선일보 견습기자 2기 로 언론계에 뛰어드셨다. 그리고 사회부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사회부 차장(1962년), 주월 특파원(1965년),문화부 차장(1966년),주간조선 주간(1970년),사회부장(19기년), 편집국 수석부국장(1973년),논설위원(1975년),월간 산 편집인(1982년), 논설실장(1986년),주필(1989년),상무이사 논설고문(1990년사 전무대우 논설고문(1991년) 등이 되시어 2004년 정년퇴임까지 45년간 조선일보에서 글을 써왔다.

 

조선일보에 연재한 대형 시리즈만도 37개나 된다. 선생은 1968년 60회를 이어간 ‘개화 백경’으로 그토록 거창한 일의 물꼬를 텄다. 오랜 내공과 축적을 기반 삼아 마침내 선생의 본령(本領)이 발휘된 시기였다. 외래 문물 수용에 정신 없는 시점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검색하고 다지는 발상이 역으로 빛났다.

 

60회 신문 전면 연재는 한국신문 사상 가장 긴 전면 연재 시리즈로 남아 있다. 또 ‘개화 백경’은 해외 63개 대학연구소에서 한국학 자료로 쓰인 기록도 있다. 이 후 선생은 53회짜리 ‘인맥’ 시리즈와 ‘개화 백경’이 우리의 역사적 외양을 멀리에 둘러 돌이켰다면,‘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우리네 삶을 지배하는 풍경과 내력을 안에서 요모조모 비춘 만화경이다.

당시 연재가 시작된 뒤 선생의 우리 것 찾기는 일대 현상을 불렀다. 대학에선 토론 대상,기업에선 연수 교재,군인에선 교육 자료가 됐다. ‘의식구조’는 이어 '선비’ ‘서민’ ‘서양인의 의식구조’ 등으로 세분되어 계속 이어졌다.

선생은 깊은 한국문화에 대한 사랑으로 문화체육부 문화재 위원으로 위촉 받았으며,나중에는 문화관광부 세시풍속 생활화 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시었다. 선생의 기자 생활은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961년 선생의 소록도(小鹿島) 한센병 환자촌 취재 모습은 이청준(李清俊)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 그대로 등장한다. 나중에 이청준은 선생의 기사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고 했다.

초대형 연재 기사를 기획부터 집필까지 모두 하셨던 선생은 1983년 3월 1일을 기하여,‘이규태 코너’로 입지를 좁히고 말수를 줄였다. 대형 기획이 아닌 매일 벌어지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우리의 옛것과 비교 분석해 독자들로 하여금 미래를 판단할 수 있게 돕는 그런 칼럼을 매일 쓰신 것이다.

하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도 몰랐다. 횟수로 6,702회,햇수로 24년에 이르도록 계속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조선일보에서 정년퇴임을 한 뒤에도 칼럼은 계속됐고,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연재는 계속됐다.

그쯤 되면 ‘코너’는 이미 코너가 아니었다. ‘대장정의 총화’였다. 단편일지언정 매번 똑 떨어지는 완성도를 요구하는 글의 성격으로 미루어 가히 세계적이었다.

‘코너’가 모여,무변의 대지를 이룬 장관이 따로 없다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선생은 ‘씨받이’ 문화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고,‘코너’ 형식의 글쓰기는 미국 교재에도 실렸다.

120권을 헤아리는 저술 업적으로 선생은 ‘한국 신문상’,‘서울시 문화상’,‘연세 언론인상’,‘삼성 언론상 특별상’ 등을 수상하였다.

또 1996년에는 전북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도 수여받았다.

1965년 우촌 전진한(錢鎭漢) 선생의 4녀 전방자 여사와 결혼하여 사부,사로, 사우 등 세 아들을 얻은 선생은 2006년 2월 26일 숙환으로 다스리던 삼성서울병원에서 생을 마치셨다.

장례는 조선일보 사우장(朝鮮日報 社友葬)으로 거행되었다(2012년 7월).

 

* 이규태 선생에 관하여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 참고 글을 첨가한다.

 

논설가,언론인 이규태(李圭泰)

언론가 이규태(李圭泰)는 안성이씨 합문부사공파 종인(宗人)이다.

그는 1933년에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연세대학교 이공대(理工大) 화 학공학과(化學工學科)를 졸업하였다. 이규태 종인은 선택한 이과계 화공과를 나와서 그 분야의 과학자 길을 걸어야 전공분야일 터인데,1959년〈조선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이규태 종인은 조선일보의 자랑스러운 보물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이규태” 기자가 되었다.

이규태 종인은〈조선일보(朝鮮曰報)〉기자생활을 하면서 많은 글을 남겼고,논설위원이 되면서〈조선일보〉‘이규태 코너’에서 약5천회에 가까운 칼럼을 썼다. 칼럼 내용은 주로 한국학과 한국인에 대한 것들로,한국인의 뿌리를 찾고 구 문물의 내력을 밝혀 외국과 비교하는 것들이 많다. 저서에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동양 인의 의식구조’,‘이규태 600년 서울’ 등이 있다.

이규태를 생각하며 쓴 글을 탐문하여 찾아 발췌한 자료를 보니 다음과 같은 그의 문필 세계를 알 수가 있다.

이규태는 해박(該博)한 지식을 무기로 재미있고 여운(餘韻)이 있는 글들을 부지런히 내놓았다. 1983년부터 24년간 계속된 “李圭泰코너”가 독자들의 가슴 속에서 꽃피어 왔다.

이 코너에서 다루는 내용은 늘 시사와 관련된 것이지만 인용(引用)하는 자료는 동서 양(東西洋)의 고서와 전문지 식을 넘나들고 있다. 그 분의 해박(該博)함과 주옥과도 같은 명문에 매료되어 거의 하루를 그의 코너 읽기로 시작되곤 했다. 그의 글에 빠져 들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즉 옛 것을 연구하여 거기서 새로운 지식이나 도리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했다.

〈일반 참고 자료〉

 

즉 현대에서 옛날로 넘나들며,옛 지식을 읽고 반추하여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하는 글이 었다.

이규태 종인은 1959년《조선일보》기자로 언론계에 들어가 문화부 • 조사부를 거쳐 주로 논설을 집필하였으며,날카로운 필치로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오늘의 세태에 대한 비판 작업을 전개하였다.

이규태 종인의 타계에 즈음하여 조선일보에 특집으로 쓴 오태진 논설위원의 글을 읽고 이 중 참고 자료로 발췌한 것을 아래와 같이 기록해 본다.

1975년부터〈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연재하면서 우리의 것을 찾기에 노력한 이규태는 한국인에게 한국인이 누군인가를 일깨워 준 기자였다.

그는 펄벅과 만남이 있었다. I960년 방한한 펄벅은 농부가 볏단 실은 소달구지를 끌면서 지게에 벗단을 지고 가는 모습에 감탄했다. “농부도 지게도 달구지에 오르면 될텐데,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저 마음이 내가 한국에서 보고싶었던 것이다” 이규태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풍경에 펄벅이 감동하는 것을 보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실마리를 잡았다. 우리 것의 원형을 찾는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책 1만 5천권이 찬 지하실은 한국학 벙커였다. 이규태는 이름이 ‘한국학’ 앞에 붙어 불렸던 기자였다.

 

이규태는 겉은 질박하고 속은 따스한 기자였다. 어렵게 자란 만큼 그는 평생 검약하게 살았다. 그러나 뜻 맞는 후배들과는 곧잘 낙지집 선술집에서 소주 자리를 함께했다. 늘 그 양복을 입고 다녔어도 후배 전세금은 선뜻 빌려주곤 했다. 수십 년 고정 칼럼을 이어온 피 말리는 행군은 무던함과 진중한 참을성,질박한 성품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규태는 자기를 알아보고 배려해 준 윗사람들에게 글로 보답한 기자였다.〈이규태 한국학〉의 출발점으로〈개화 백경〉과 세계 언론사에 남을〈이규태 코너〉연재를 그에게 권한 사람이 당시 사장인 방우영 명예회장이었다.

〈조선일보 특집 오태진 논설위원의 글. 25일 별세한 기자 이규태의 삶〉

 

〈약력〉

• 1933년 9월 6일 전북 장수 출생

• 1956년 연세대 이공대 졸업.

• 1959년 조선일보 입사,문화 • 사회부 기자

• 1965년 주 월남특파원

• 1966년 사회부 차장,문화부장,조사부장

• 1970년 주간조선 주간

• 19기년 사회부장

• 1973년 편집국 부국장

• 1974년 수석부국장

• 1975년 논설위원

• 1986년 논설위원장

• 1989년 조선일보 이사 주필

• 1996년 전북대 명예 문학박사

• 2004년 대한언론인회 자문위원

  타계 당시 조선일보 논설고문

  1983~2006년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6,702회 연재,

  24년 동안 6,701회 게재된 이규태 코너 마감

• 2006년 2월 25일 사망

 

< 수상>

• 2004년 대한언론인회 자문위원 수상

• 2006년 은관 문화훈장

• 1972년 서울시 문화상(언론분야)

 

〈저서〉

〈한국인의 의식구조〉전4권,〈서민의 의식구조〉〈선비의 의식구조〉〈서방인의 의식구 조〉〈동양인의 의식구조〉〈뽐내고 싶은 한국인〉〈한국 여성의 의식구조〉전2권,〈한국인 의 정서구조〉 전2권,〈한국학 에세이〉전2권,〈新열하일기〉〈한국인 이래서 잘 산다〉〈한 국인 이래서 못산다〉〈한국인의 밥상문화〉전2권,〈한국인의 주거문화〉전2권,〈암탉이 울어야 집안이 잘된다〉전2권,〈이규태의 600년 서울〉〈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한국인의 재발견〉〈개화 백경〉〈한국의 인맥〉〈서민 한국사〉〈민속 한국사〉〈이규태 코너〉 등 6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