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손,우영(祜英)
한 편의 글로 사람들의 아침을 새롭고 다감하게 열어 준 불세출(不世出)의 기자 이규태 선생. 선생은 격변하는 나날을 변치 않은 과거를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겨냥하고자 하셨다.
펜으로 시작한 글쓰기 수단이 컴퓨터 키보드를 치는 세상이 되도록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계층 독자에게 일상의 징후를 웅숭깊게 새겨 전달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아울러 특유의 친근한 문법으로 보편타당한 쓰기와 일기의 경지를 여셨다.
선생의 본관은 안성(安城)이시다. 안성 합문부사공파(閤門副使公派) 봉례공파 후손으로 1933년 전북 장수(長水)에서 이전섭 선생의 4남으로 태어나 유년을 고향에서 보냈다.
일제와 해방 그리고 사상 대립의 혼란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남다른 감수성은 이 무렵에 홈백 젖고,자라서 훗날의 문필 활동에 더없이 소중한 바탕을 이루었다.
시대의 첨단을 예리하게 응시하시면서도 일찍이 체득한 농경 정서가 뒤를 받쳐 기사와 칼럼이 한결 넉넉한 설득력에 넘쳤다.
전주사범학교(1952년)와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하시고(1956년) 선생은 잠시 군산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가 1959년 3월 조선일보 견습기자 2기 로 언론계에 뛰어드셨다. 그리고 사회부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사회부 차장(1962년), 주월 특파원(1965년),문화부 차장(1966년),주간조선 주간(1970년),사회부장(19기년), 편집국 수석부국장(1973년),논설위원(1975년),월간
산 편집인(1982년), 논설실장(1986년),주필(1989년),상무이사 논설고문(1990년사 전무대우 논설고문(1991년) 등이 되시어 2004년 정년퇴임까지 45년간 조선일보에서 글을 써왔다.
조선일보에 연재한 대형 시리즈만도 37개나 된다. 선생은 1968년 60회를 이어간 ‘개화 백경’으로 그토록 거창한 일의 물꼬를 텄다. 오랜 내공과 축적을 기반 삼아 마침내 선생의 본령(本領)이 발휘된 시기였다. 외래 문물 수용에 정신 없는 시점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검색하고 다지는 발상이 역으로 빛났다.
60회 신문 전면 연재는 한국신문 사상 가장 긴 전면 연재 시리즈로 남아 있다. 또 ‘개화 백경’은 해외 63개 대학연구소에서 한국학 자료로 쓰인 기록도 있다. 이 후 선생은 53회짜리 ‘인맥’ 시리즈와 ‘개화 백경’이 우리의 역사적 외양을 멀리에 둘러 돌이켰다면,‘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우리네 삶을 지배하는 풍경과 내력을 안에서 요모조모 비춘 만화경이다.
당시 연재가 시작된 뒤 선생의 우리 것 찾기는 일대 현상을 불렀다. 대학에선 토론 대상,기업에선 연수 교재,군인에선 교육 자료가 됐다. ‘의식구조’는 이어 '선비’ ‘서민’ ‘서양인의 의식구조’ 등으로 세분되어 계속 이어졌다.
선생은 깊은 한국문화에 대한 사랑으로 문화체육부 문화재 위원으로 위촉 받았으며,나중에는 문화관광부 세시풍속 생활화 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시었다. 선생의 기자 생활은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961년 선생의 소록도(小鹿島) 한센병 환자촌 취재 모습은 이청준(李清俊)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 그대로 등장한다. 나중에 이청준은 선생의 기사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고 했다.
초대형 연재 기사를 기획부터 집필까지 모두 하셨던 선생은 1983년 3월 1일을 기하여,‘이규태 코너’로 입지를 좁히고 말수를 줄였다. 대형 기획이 아닌 매일 벌어지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우리의 옛것과 비교 분석해 독자들로 하여금 미래를 판단할 수 있게 돕는 그런 칼럼을 매일 쓰신 것이다.
하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도 몰랐다. 횟수로 6,702회,햇수로 24년에 이르도록 계속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조선일보에서 정년퇴임을 한 뒤에도 칼럼은 계속됐고,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연재는 계속됐다.
그쯤 되면 ‘코너’는 이미 코너가 아니었다. ‘대장정의 총화’였다. 단편일지언정 매번 똑 떨어지는 완성도를 요구하는 글의 성격으로 미루어 가히 세계적이었다.
‘코너’가 모여,무변의 대지를 이룬 장관이 따로 없다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선생은 ‘씨받이’ 문화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고,‘코너’ 형식의 글쓰기는 미국 교재에도 실렸다.
120권을 헤아리는 저술 업적으로 선생은 ‘한국 신문상’,‘서울시 문화상’,‘연세 언론인상’,‘삼성 언론상 특별상’ 등을 수상하였다.
또 1996년에는 전북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도 수여받았다.
1965년 우촌 전진한(錢鎭漢) 선생의 4녀 전방자 여사와 결혼하여 사부,사로, 사우 등 세 아들을 얻은 선생은 2006년 2월 26일 숙환으로 다스리던 삼성서울병원에서 생을 마치셨다.
장례는 조선일보 사우장(朝鮮日報 社友葬)으로 거행되었다(2012년 7월).
* 이규태 선생에 관하여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 참고 글을 첨가한다.
논설가,언론인 이규태(李圭泰)
언론가 이규태(李圭泰)는 안성이씨 합문부사공파 종인(宗人)이다.
그는 1933년에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연세대학교 이공대(理工大) 화 학공학과(化學工學科)를 졸업하였다. 이규태 종인은 선택한 이과계 화공과를 나와서 그 분야의 과학자 길을 걸어야 전공분야일 터인데,1959년〈조선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이규태 종인은 조선일보의 자랑스러운 보물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이규태” 기자가 되었다.
이규태 종인은〈조선일보(朝鮮曰報)〉기자생활을 하면서 많은 글을 남겼고,논설위원이 되면서〈조선일보〉‘이규태 코너’에서 약5천회에 가까운 칼럼을 썼다. 칼럼 내용은 주로 한국학과 한국인에 대한 것들로,한국인의 뿌리를 찾고 구 문물의 내력을 밝혀 외국과 비교하는 것들이 많다. 저서에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동양 인의 의식구조’,‘이규태 600년 서울’ 등이 있다.
이규태를 생각하며 쓴 글을 탐문하여 찾아 발췌한 자료를 보니 다음과 같은 그의 문필 세계를 알 수가 있다.
이규태는 해박(該博)한 지식을 무기로 재미있고 여운(餘韻)이 있는 글들을 부지런히 내놓았다. 1983년부터 24년간 계속된 “李圭泰코너”가 독자들의 가슴 속에서 꽃피어 왔다.
이 코너에서 다루는 내용은 늘 시사와 관련된 것이지만 인용(引用)하는 자료는 동서 양(東西洋)의 고서와 전문지 식을 넘나들고 있다. 그 분의 해박(該博)함과 주옥과도 같은 명문에 매료되어 거의 하루를 그의 코너 읽기로 시작되곤 했다. 그의 글에 빠져 들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즉 옛 것을 연구하여 거기서 새로운 지식이나 도리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했다.
〈일반 참고 자료〉
즉 현대에서 옛날로 넘나들며,옛 지식을 읽고 반추하여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하는 글이 었다.
이규태 종인은 1959년《조선일보》기자로 언론계에 들어가 문화부 • 조사부를 거쳐 주로 논설을 집필하였으며,날카로운 필치로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오늘의 세태에 대한 비판 작업을 전개하였다.
이규태 종인의 타계에 즈음하여 조선일보에 특집으로 쓴 오태진 논설위원의 글을 읽고 이 중 참고 자료로 발췌한 것을 아래와 같이 기록해 본다.
1975년부터〈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연재하면서 우리의 것을 찾기에 노력한 이규태는 한국인에게 한국인이 누군인가를 일깨워 준 기자였다.
그는 펄벅과 만남이 있었다. I960년 방한한 펄벅은 농부가 볏단 실은 소달구지를 끌면서 지게에 벗단을 지고 가는 모습에 감탄했다. “농부도 지게도 달구지에 오르면 될텐데,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저 마음이 내가 한국에서 보고싶었던 것이다” 이규태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풍경에 펄벅이 감동하는 것을 보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실마리를 잡았다. 우리 것의
원형을 찾는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책 1만 5천권이 찬 지하실은 한국학 벙커였다. 이규태는 이름이 ‘한국학’ 앞에 붙어 불렸던 기자였다.
이규태는 겉은 질박하고 속은 따스한 기자였다. 어렵게 자란 만큼 그는 평생 검약하게 살았다. 그러나 뜻 맞는 후배들과는 곧잘 낙지집 선술집에서 소주 자리를 함께했다. 늘 그 양복을 입고 다녔어도 후배 전세금은 선뜻 빌려주곤 했다. 수십 년 고정 칼럼을 이어온 피 말리는 행군은 무던함과 진중한 참을성,질박한 성품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규태는 자기를 알아보고 배려해 준
윗사람들에게 글로 보답한 기자였다.〈이규태 한국학〉의 출발점으로〈개화 백경〉과 세계 언론사에 남을〈이규태 코너〉연재를 그에게 권한 사람이 당시 사장인 방우영 명예회장이었다.
〈조선일보 특집 오태진 논설위원의 글. 25일 별세한 기자 이규태의 삶〉
〈약력〉
• 1933년 9월 6일 전북 장수 출생
• 1956년 연세대 이공대 졸업.
• 1959년 조선일보 입사,문화 • 사회부 기자
• 1965년 주 월남특파원
• 1966년 사회부 차장,문화부장,조사부장
• 1970년 주간조선 주간
• 19기년 사회부장
• 1973년 편집국 부국장
• 1974년 수석부국장
• 1975년 논설위원
• 1986년 논설위원장
• 1989년 조선일보 이사 주필
• 1996년 전북대 명예 문학박사
• 2004년 대한언론인회 자문위원
타계 당시 조선일보 논설고문
1983~2006년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6,702회 연재,
24년 동안 6,701회 게재된 이규태 코너 마감
• 2006년 2월 25일 사망
< 수상>
• 2004년 대한언론인회 자문위원 수상
• 2006년 은관 문화훈장
• 1972년 서울시 문화상(언론분야)
〈저서〉
〈한국인의 의식구조〉전4권,〈서민의 의식구조〉〈선비의 의식구조〉〈서방인의 의식구 조〉〈동양인의 의식구조〉〈뽐내고 싶은 한국인〉〈한국 여성의 의식구조〉전2권,〈한국인 의 정서구조〉 전2권,〈한국학 에세이〉전2권,〈新열하일기〉〈한국인 이래서 잘 산다〉〈한 국인 이래서 못산다〉〈한국인의 밥상문화〉전2권,〈한국인의 주거문화〉전2권,〈암탉이 울어야 집안이
잘된다〉전2권,〈이규태의 600년 서울〉〈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한국인의 재발견〉〈개화 백경〉〈한국의 인맥〉〈서민 한국사〉〈민속 한국사〉〈이규태 코너〉 등 60여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