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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이씨(安城李氏)의 시원(始源)

 

‘시조(始祖)’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실존의 인물로서 즉 선조(先祖)로서 첫 번째 조상을 이르는 말이다.

‘비조(鼻袓)’란 시조 이전의 인물로 더 추적하여 선계조상(先系祖上) 중 가장 위의 사람을 일컫는 조상이다. 즉 ‘원조(元朝)’를 말한다.

‘중시조(中始祖)’는 시조 이하의 역대 선조 중 중간 선조를 말한다. 특히 쇠퇴(衰退)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 조상으로,종중(宗中)의 공론에 따라 정하여 추종(追從)하는 선조이다.

 

안성이씨의 기원(起源)과 시조(始祖)와 관향(貫鄕) 등에 관하여는 안성이씨 대동보(大同譜) 세보 세덕편(世譜 世德、編)에 다음과 같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를 참고 자료로 인용해 본다.

 

謹按麗史公姓李諱仲宣高麗文宗朝初爲京軍戶長有長民之公遷至門下侍中 因資義之亂從台輔王國髦有定社勳業陞三重大匡太師三韓壁上功臣封白夏君 白夏卽安城古號也而子孫因籍貫焉依據舆地勝覽考事撮要三韓事實安城郡古 號卽白夏縣而新羅景德王時改白夏爲白城高麗初改白城爲安城太袓六年始置 郡守太宗十三年頃於竹山府今卽竹山陽城皆附於安城郡焉 遡考于中國隴西李氏青綸系有倫三長曰孟宣次曰仲宣季曰季宣皆宋朝A慶 曆間宋使安燾陳睦使麗時接伴李某渡麗卽文宗朝也公始仕麗朝歷使四朝及獻 宗以凉德所致遜位于鷄林公之時乞骸歸于田里遂食采於白城縣焉子曰永高麗 肅宗朝登科官至御史臺事寶文閣學士女適中樞府事韓安仁孫曰元長官西海按 廉使其曾玄後裔曰玖官閤門副使曰禧官吏部侍郎曰裕官兵部尚書曰克儼官左 司郎中曰惟仁官密直副使曰共白官廣陵府院君也而前後六派子孫或先或後系 出白夏君立宗法修派系也

〈安城李氏世譜世德編始袓白夏君事實並貫鄕事實記〉

 

〈삼가 고려사(髙麗史)에서 살피건대 공의 성은 이(李)요,휘(諱)는 중선(仲宣)으로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초관(初官) 경군호장(京軍戶長)으로 계시면서, 치민선정(治民善政)의 공을 세우시고 거듭 천거(薦擧)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 현 대통령비서실장 격)에 천지(遷至) 되셨으며 자의(資義)의 난(亂) 때,왕국모(王國髦)와 더불어 이자의(李資義)의 역모를 평정하고 사직(社稷)의 위태로움을 도운 훈업(動業)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현 국무총리 격)에 승진하시고,삼한벽상공신으로 좌명되심과 동시에 백하군(白夏君)으로 책봉(册封) 되셨다. 백하(白夏)는 현 안성(安城)의 옛 지명으로서,자손들의 관적(貫籍)으로 삼은 것이 여지승람(與地勝覽)과 삼한실기(三韓實記)에서 찾을 수 있다. 안 성의 지명 변천 유래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백하(白夏)를 백성(白城)으로 개칭(改稱)하였다가 고려조 때,백성(白城)을 안성(安城)으로 개칭하고,조선 태조조(太祖朝) 6년에 현감직제(縣監職制)로부터 군수직제(郡守職制)로 격상하 고 태종조(太宗朝) 13년에 죽산부(竹山府)를 안성군역(安域郡域)으로 편입함으로써 현금의 죽산(竹山),양성(陽城)이 안성군(安城郡)으로 된 것이다.

 

지나온 과거를 소급하여 고찰하면,시조(始祖)는 중국 농서이씨청륜계(中國 隴西李氏靑綸系)의 맹선(孟宣) • 중선(仲宣) • 계선(季宣) 삼형제 중 둘째 분으로서,1048년경인 송경력간(宋慶曆間)에 송국사신(宋國使臣)으로 안도(安燾) 진목(陳睦)과 더불어 내려(來麗)하시여,여조 문종왕(麗朝 文宗王)의 어청(御請)으로 세자 세손의 사부(師傅)를 소임하면서 정주(定住)를 작심하시고,그 후 경군호장을 초관으로 삼중대광태사까지 지내시며 헌종(獻宗)까지 4조(四祖) 를 섬기시던 중,헌종(獻宗)의 병약(病弱)으로 인하여 뒤에 숙종왕(肅宗王)이 된 계림공(鷄林公)에게 손위(遜位)코저 할 무렵의 충격과,그 후로 거듭되는 문란(紊亂)한 세태(世態)를 개탄(慨嘆)하시고,봉군지(封君地)인 백성현으로 내 려가심에 조정에서 그곳을 식읍(食邑)으로 내리었으며,그곳에서 종신(終身) 하셨다.

 

그 어버이의 고매한 뜻을 받들어 경전근학(耕田勤學)하던 그의 2세(二世)인 아드님 영(永)께서는,뒤에 고려 숙종조(肅宗朝)의 어사대사(御史臺事)와 예종 조(睿宗朝)의 보문각학사(寶門閣學士), 그 사위인 청주인 한안인(淸州人 韓安人)은 중추부사(中樞府使),그의 3세(世)인 손자 원장(元長)은 서해안렴사(西海 按廉使) 등의 벼슬을 지내시고 증손(曾孫) 현손(玄孫) 등 후예를 두셨으되,증손 6형제(六兄弟) 중 휘 극엄(克儼) 한 분 이외의 다섯 분은 실휘실전(失諱失 傳)으로 자세(仔細)치 않으나,5세인 구(玖)는 합문부사(閤門副使),6세인 희(禧)는 이부시랑(吏音뜨侍郞),유(裕)는 병부상서(兵部尙書),증손(曾孫)인 극엄(克儼)은 좌사랑중(左司郞中),8세인 유인(裕仁)은 밀직부사(密直副使)이고,공백(共白)은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등이다.

 

이렇게 6파(六派) 자손들이 혹은 먼저 혹은 뒤로하여,백하군(白夏君)의 종지(宗支)의 법통(法統)을 세워 파계(派系)를 잇고 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 安城李氏 大同譜 世德編〉

 

위 자료로 인용한 글의 내용인즉 휘 중선(仲宣) 시조가 안성에서 경군 호장(京軍 戶長)으로 생을 시작하여 관향(貫鄕)을 안성으로 자손들이 번성하여 오늘에 이르렸기에 이 씨족을 안성이씨라 한다는 것이다.